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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출신 엘리트 귀농인` 이성호·윤은정 씨 부부 ˝농사가 가장 정직한 노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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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종기 작성일19-10-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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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농장'에서 오미자 수확기를 맞아 이성호씨 부부가 열매를 살피고 있다.   
[경북신문=봉종기기자] 문경시 산북면 월천리. 문경시청에서 자동차로 가면 약 40분이 걸리고 띄엄띄엄 있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30분이 걸리는 오지에 현대자동차 전산실 출신의 엘리트 도시인 부부가 오미자 농장인 '아이들(idle) 농장'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

◆대기업 출신 엘리트 부부, 귀농의 삶 꿈꾸다

이성호(52)씨와 윤은정(48)씨가 주인공인데 이들은 1990년대 중반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전산실에 3개월이 시차를 두고 입사했다. 두 사람은 연수시절 만나 사랑에 빠졌고 무난하게 결혼도 했다. 누가 봐도 이들 부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입사한지 10년이 넘어 두 사람의 연봉을 합쳐보니 약 1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남편 이성호씨가 전격적으로 퇴사를 결정하고 귀농을 선택했다. 2006년의 일이었다. 그때 큰 아이는 여섯살이었고 작은 아이는 세살이었다. 둘 다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모험이었다. 부인 윤은경씨가 회사에 남기로 했다. 육아문제는 주중에 대구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 맡았고 주말에는 윤씨가 서울에서 내려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했다.

이씨가 귀농을 선택한 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워낙 자연을 좋아했고 대학도 낙농이나 사진을 전공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권유로 경영학을 전공했고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즉흥적이진 않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는 했다. 이씨는 윤씨에게 결혼하기 전에 미리 "마흔 전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윤씨는 남편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을 때 서운한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고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문경에 정착한 이씨는 먼저 허허로운 벌판에 흙집을 짓기 시작했다. 흙집을 완성하는데 1년 넘게 걸렸다. 이씨는 퇴사를 한 후 전남 화순시에 있는 흙집학교를 1개월 반 동안 다녔다. 그 후 나무, 자재 등을 직접 사서 다듬고 준비해서 흙집학교 동기들과 함께 자신의 둥지를 지었다. 이씨는 "그 전에는 형광등도 잘 갈지 못했었는데 내손으로 터 닦기부터 배관까지 모두 해결했으니 엄청나게 다이내믹했다"고 말했다.

집이 완성되자 이씨는 밭을 갈아 감자, 옥수수, 고추 농사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농부의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오디 농사도 지어보면서 서서히 귀농의 틀을 잡았다. 2011년 윤씨가 전격적으로 퇴사해 문경에 합류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5년 동안의 주말부부 노릇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농장 이름은 '아이들(idle) 농장'이라고 지었다. '아이들'은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이씨는 "한국어 어감과 뜻도 좋고 회사생활 하면서 너무 열심히 살아서 좀 게으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문경에 정착하고 보니 타지 사람들에게 텃세부리지 않고 자연경관도 좋아 제대로 된 결정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 이성호씨 부부가 일군 오미자밭 모습.   
◆초보 농사꾼, 오미자에 빠지다

윤씨는 귀농을 결정할 무렵을 회상하며 "당시 두 사람의 연봉을 합치면 1억5000만원이 넘었는데 이걸 포기하고 일종의 모험을 시작한 것은 철이 없었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처음 정착할 때는 약 2700평의 밭을 먼저 매입했고 현재는 7700평 정도 늘었다. 집 한 채를 제외한 4400평은 오미자밭(4400평)으로 일궜고 나머지도 오미자밭으로 전환 중이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농사 경험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친환경 농법을 고집하느라 실패도 많이 봤다. 이씨는 "현재는 국가에서 각종 농약 사용을 인체에 무해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GAP(우수관리인증) 제도에 맞춰서 농사짓게 돼 한결 편해졌다"고 밝혔다.

이씨가 여러 작물 중 오미자를 택한 것은 오미자가 문경시의 주요 작물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문경시에서도 지원을 많이 하고 문경이 전국 생산량의 50% 넘는 오미자 주산지다 보니 그 작물이 생산 활동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 문경에는 윤창영 오미자 명장이 있어 귀농인들에게 생산 재배기술 전수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 이씨도 윤 명장의 도움을 받았다. 직접 밭으로 찾아와 개인지도도 했고 문경시에서 귀농인을 대상으로 오미자 대학도 열어줘 실질적인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씨가 오미자 농사로 전환한 것은 2009년부터다. 초반에는 기술이 없어서 수확량이 적었지만 최근 들어 기술이 늘면서 연간 7~8톤 정도는 수확하고 있다. 오미자를 소매로 팔면 1㎏ 당 1만원 정도 하지만 도매로 팔면 6000원 미만이다. 계산해 보면 1년에 45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지만 여기에 40% 정도의 농비가 들어가니 2500만원 정도가 순수익인 셈이다. 그러니 농사로 돈 번다는 말은 거짓말인 셈이다.

이씨는 "회사 그만두고 귀농할 때는 회사에 일하는 만큼 열심히 일하면 설마 이 정도는 못 벌까 생각했다"며 "막상 와서 보니 비오면 놀고 추워도 농사를 못 짓고 해서 날씨영향이 많아 노동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고생하는 만큼 돈을 버는 것이니 농사는 가장 정직한 노동"이라며 "이제 농사에 적응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하고 건강해 진다"고 덧붙였다.

                    ↑↑ 귀향 후 1년만에 지은 흙집.   
◆시골학교의 전폭적 지원에 아이들 교육 걱정 없어

윤씨는 "아이들을 시골 초, 중학교를 보내면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숫자가 비슷해 꼼꼼하게 돌봐줬고 지원과 프로그램이 너무나 다양해 교육 문제만큼은 150% 만족했다"며 "예체능 시키는데 돈이 하나도 들지 않도록 학교에서 모두 해결해 줬고 아이들이 공부할 마음만 있으면 선생님이 엄청난 지원을 했다"고 덧붙였다.

결론은 이렇다. 금전적 손해는 있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보상받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다는 점이 덤으로 받는 보상이다.

윤씨에게 귀농 이후의 부부 금슬에 대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직장생활 하는 동안 1주일에 얼굴 볼 시간이 몇 시간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었다"며 "그런데 귀농 후 24시간 붙어 있기 때문에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5~6년 지나고 나니 서로의 영역을 찾고 서서히 갈등이 중화됐다. 귀농한 집의 공통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금슬이 좋아졌다는 표현을 에둘러서 했다.
 
윤씨는 "처음 1년 동안은 남편이 일하는 것 구경하고 옆에만 있으면 고맙다고 하다가 1년이 지나면 옆에 와서 좀 잡아달라고 부탁한다"며 "그러다가 그 다음 해에는 밭에 안 나가면 서운하게 생각한다. 모든 귀농인이 같은 일상이다. 농사란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꼬임에 넘어간 내게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농사짓는 재미 쏠쏠… 사업보다는 오직 생산에 집중

이씨가 운영하는 농장은 오미자 전문 농가로는 대농에 속하지만 수익이 생각보다 적은 것은 사업보다는 생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억대 농가를 이루는 사람들은 생산 보다는 사업 쪽에 오히려 더 신경을 쓰고 상주하는 인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두 사람이 농사를 짓다가 수확기에만 파트타임으로 도우미를 쓰고 있다. 이씨는 "농업을 통한 6차 산업에 기웃거려볼 듯도 하지만 오직 생산에만 집중할 생각"이라며 "자연이 좋아서 왔기 때문에 돈도 많이 벌면 좋겠지만 돈 많이 벌려면 회사 다니는 것이 좋았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귀농에 장밋빛 로망은 금물"이라고 했다. 이씨는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은 재배하고 싶은 작물을 미리 선정해서 땅을 빌려 기존에 심어져 있는 것을 키워본다든지 연습기간을 거쳐 땅도 사고 집도 짓고 정착해야 실패가 없다"며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고 동식물 돌보는 데 적성이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씨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문경에 계속 산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어디를 가려 해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일흔이 넘으면 바닷가로 가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는 또 어떤 삶이 펼쳐질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봉종기   kb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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